* 하드 8-16 대스포!! 스토리 보지 않은 분은 결코 권장하지 않습니다.
엇갈린 매듭
w. SKY
성공 확률은 27.983%.
그걸 위해선 둘이 동시에 매듭의 조건을 달성해야 해.
현재 시간에서의 끝맺음이 필요해.
카르티스 클라우디스는 매듭의 종결을 따라 열 두 살의 시점에서 다시금 눈을 떴다. 이번이 몇 번째의 삶인지, 셀 수 없을 정도였으나 이제는 더이상 의미를 생각치 않아도 되었다. 더는 오지 않을, 마지막 열 두 살의 해. 이번 삶이 제게 주어진 단 한 번 남은 기회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간 잊어버리고 살았던 심장 고동소리가 기대감으로 울리고 있었다. 이 반복되는 삶도 이제는 끝이다. 먼 시간의 끝에는 자신의 대적자이자 유일한 시간의 동반자인 그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자신의 선택이라 여겼던 시간들이 사실은 스스로의 의지와는 무관히 반복되기만 할 뿐이라는, 진실이라는 절망을 깨닫고 만 그를 구해준 이였다. 환히 빛나는 햇살과도 같은, 단단한 벽을 투과하고 곧게 들어오는 광기(光氣)는 광기(狂氣)와도 같았다. 그런 그가 함께하고자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서 획득한 기회다. 그를 만나기까지 긴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이 숨 막히는 톱니바퀴의 회전을 멈출 수 있다면, 종말에 대적하여 생(生)을 쟁취할 수 있다면 그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있을 터였다. 지금까지의 삶이 타자에 의해 강제된 회귀라는 톱니였다면, 이번의 삶은 그에 맞서는 인간의 의지였다.
시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흘러갔다. 지난 삶의 기억들을 토대로 유약한 3황자는 날이 갈 수록 위로 올라섰으며, 자신의 지반을 다졌다. 수 백, 수 천 번 겪은 시간대였음에도 금번대의 시간은 어쩐지 느리게만 흐르는 것 같았다. 하루하루 날이 가는 것을 세는 습관이 생긴 것은 그 연장선인지도 모른다. 단 한 순간이라도 방심한다면, 만나러 가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자신에게 이러한 충동적인 감정이 남아있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결코 옳은 선택이 아닌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성장과정에서 갈루스의 황자를, 황제를, 그리고 동부대륙의 정세를 모르는 채 자라나야했다. 일정한 세계의 인과에서는 벗어난 존재일지라도 흐름이란 것이 있다. 그 흐름에 어긋나는 인과가 맞부딪힌다면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니까. 머리로는 분명히 알고 있었으나…, 끝내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둘의 매듭점은 서로 크게 차이가 있었기에 카르티스가 아직 황위를 양위받지 않은 시간대에서 아발론에 방문하는 것은, 실상 국제정세 적으로도 의미를 찾기 힘든 행위였다. 멀고 먼 서부 대륙으로의 유학을 입에 올렸을 때 황실과 대신들의 눈초리를 받는 일이야 예상 범주 내에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왠지 모를 조급함이 그를 아발론으로 이끌었다.
서부 대륙은 갈루스 제국으로부터 한참을 배를 타고 나아가야 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두 번의 시간대에서, 이 길을 저보다도 멀리 돌아 제 앞에 도달한 것이겠지. 되감긴 매듭의 시간대를 회상하는 사이 갈루스의 휘장을 단 배는 서부의 땅에 닿았다.
아발론은, 과장을 섞는다면, 갈루수의 도시 하나에 비할 정도로 작은 변방의 소국임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 때였다. 용의 수호를 받는 나라라고는 하나, 그저 신화에 불과할 이야기였다. 그야 이 나라의 미래에 군주가 될 이는 용이 아닌 제 3의 존재─유니버스─의 수호를 받게 될 테니까. 이는 그가 듣고 보아 알고있는 유일무이한 진실 중 하나였다.
기억하지 못하는 이의 과거에 끼어든다하더라도
매듭의 때가 다가왔을 때 나를 기억할 것인가.
시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갈루스의 황자는 아발론을 비롯한 서부 대륙에서의 유학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였으며, 그 과정에서 그간의 시간대에서는 마주하지 못한, 혹은 적대관계로 마주한 이들과도 접점을 만들었다. 마지막 기회이기에 갖고자 한, 계획적인 만남은 아니었다. 아발론의 군주가 될 이에게 자신을 새기기 위한 시간이 필요한 만큼, 그 시간을 충실히 보낸 것이었다. 허투루 보낼 틈일랑 전무하였으니.
하지만 그는 갈루스의 황자. 제국으로 귀국해야하는 날이 다가왔다. 돌아가야만 했다. 그저 3황자가 아닌 제국을 통일한 황제의 업을 지고서 만남을 가져야 했으니까. 동등한 군주의 위치에서 만나야 했으니까. 채 어린 티를 벗지 못한 그의 대적자는 그러한 사실들을 알지 못하는 채 담담히 배웅에 나섰다. 그간의 만남에서 기억하지 못할 과거의 이야기를 넌지시 꺼내본 적이 있어서일까, 황제가 된다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벗어두라는, 웃지못할 이야기가 카르티스에게 남겨진 마지막 인사였다.
***
─ 듣고있어?
낯설지만,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에 닿자 고개를 들었다. 고저 없는 단정한 목소리. 소녀의 것인 듯 싶으나, 동시에 성별을 예측하기 힘든 목소리. 유니버스의 단말이었다. 하지만, 람다는 여전히 잠들어 있을텐데. 그렇다면.
─ 나는 뮤. 유니버스의 열 세 번째 모델. 모델 람다의 회선을 역추적해서 연결. 당신에게 전달하고 있어.
이번에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발론의 군주와 계약했을, 열 세번 째 모델인 뮤. 그가 어찌하여 제 계약자도 아닌 자신에게 말을 건네오는 것일까.
"그대는…, 그렇군. 유니버스의 단말. 하지만 이번에도 계약자는 따로 있을 텐데."
─ 응. 내 마스터는 당신이 아니야. 하지만 당신이 알아야 할 사항이 있어.
"짐이 알아야 할 사항이라?"
─ 두 매듭이 동시간대에 끝맺어진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한 것 같아. 어쩌면, 뮤가 모르는 새로운 인과가 겹쳐지며 생긴 오류일 수도 있어.
"오류? 무슨 말이지. 상세히 이야기해봐라."
─ 마스터는 지난 시간대를 기억하지 못해. 27.983%의 확률은 성공했지만 마스터의 기억은 온전히 이전되지 않았어.
격양 없이 담담히 사실을 전하는 목소리였으나 다소의 난처함이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소식을 전해듣는 카르티스 또한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으니 말이다. '새로운 인과' 라면 혹시, 만나선 안되었던 시간대에 만나고 만, 그것을 의미하는 이야긴지도 모른다. 이는 분명한 자신의 몫이었다.
"그렇다한들, 첫 시간대의 기억은 있을테지. 그렇다면 문제가 없다. 그의 기억에 문제가 생겼다한들, 그의 목적이 달라지진 않았을테니 그 부분은 내가 일러줘야 할 지도 모르겠군."
─ ……뮤는 마스터에게 이전 시간대를 언급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 거부당했어. 그래서 동기화 과정에서 마스터의 시간에 외부의 존재가 개입한 이력이 있는지 확인해보는 중이야. 얼마나 걸릴 지는 알 수 없어.
"내게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은 분명 단독 판단에 의한 것일테지."
─ 뮤는 이 정보를 당신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뮤의 긍정에 카르티스는 속으로 헛웃음을 들이켰다. 그와의 연결고리는 남아있다. 비록 그가 제게 건넨 당부를, 그는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자신이 기억하고 있었으며 유니버스 또한 기억하고 있다. 첫 번째의 시간을 겪은 이후라면, 그의 목적은 여전할 터. 그를 납득시킬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납득하지 않더라도 받아들일 것이다. 마지막 기회, 공통된 목표. 그러니 조율을 하자고. 카르티스 클라우디스는 미소지었다.
매듭은 엇갈렸고, 결국 그와 기억을 공유하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괜찮다. 스스로 되뇌인다. 애초에 주어질 수 없을 기회를 얻었음에 감사해야지.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마냥 아쉬워할 수 만은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약속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적은 없으나 받아들인 것은 스스로였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업을 지켜야지. 그 과정에서 그가 자신을 기억해 줄 지, 누가 알겠는가.
"첫 번째의 귀로가 나로 인한 죽음으로 야기되었다 하였는데. 이번 생에의 기억와 지난 기억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믿어보겠다. 그 자가 그정도에 흔들릴 거라곤 생각지 않으니.
열 세 번째여, 나는 기다리겠다. 나의 대적자가 자신의 중심을 되찾고 이곳에 다다를 때까지. 내가 할 수 있을 일들을 준비해두도록 하지."
그럼 뮤는 가볼게. 그에 마주하는 인사는 없었다. 다시금 눈을 떴을 때에는 익숙한 황궁의 풍경이 자리해있었다. 체자렛이 곁에 있었다면 눈치챘을까 싶으나, 지금은 자리를 비운 때였다.
깊은 숨을 들이쉬자 가슴 한 켠에서 낙엽이 진다. 이건 무슨 연유인걸까. 너의 삶에 나라는 흔적을 짙게 남겼음에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있다. 이는 공백이 되어버린 너의 기억 때문인 것일까. 반토막 난 기억이 뒤섞인 끝에 네가 내릴 결정이 두렵기 때문일까. 두려움이란 오직 종말에 한한 것인 줄로만 알았다. 늪에 빠진 이에게 손을 내밀고, 잊고 지냈던 희망을 쥐여주고, 그리고 아쉬움이란 이름을 붙일 법한 감정을,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존재.
너는 여전히 나의 대적자에 불과한가. 아발론의 군주여.
27.983%의 가능성은 성공했으나 매듭은 엇갈리고 말았다. 더이상의 기회를 제공받을 수 없을 것을 안다. 그렇기에 하나로 잇는 것은 불가할 것이다. 카르티스 클라우디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가 가진 공백의 이야기.이제는 혼자만이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 어디까지 믿을 지는 그 자의 선택이다. 어린 날의 시기를 이후로 서부대륙으로의 원정은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은, 그리고 행할 일은 한 가지다. 지난 시간대와 같이, 기억하지 못하는 귀로가 있었던 시간대와 같이 갈루스 제국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 그가 가져올 답변을. 그리고, 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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